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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태어나 집은 페낭이고 도쿄에서 일하는 루슨(여권 미들네임)이 써 가는 블로그입니다. #Korea #Penang #Tokyo
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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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7. 18. 16:22 일상 日常

오랫만에 페이스북에 들어 갔다가 12년 전에 쓴 글이라고 뜨길래 여기에 옮겨 둡니다.

일본의 복날

한국에선 삼계탕, 보신탕을 먹는데 일본에선 우나기(うなぎ, 장어)를 먹습니다.

일본에도 복날이 있을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복날(伏日)이라고 했을 뿐 없습니다. 비슷한 의미의 도요노우시(土用の丑)가 있습니다.
이날 모두 장어 덮밥을 먹습니다. 슈퍼나 백화점에는 장어 사느라 북세통을 이룹니다.

한국은 삼복(三伏)이라 해서 초복, 중복, 말복 이렇게 3번에 걸쳐 보신하는데 비해 일본의 우나기 먹는 날은 1번 또는 2번입니다.

왜 한번 아니면 두번??

그 해답은 土用の丑에 있습니다.
토용(土用)은 음양오행(陰陽五行), 축(丑)은 십이지간(十二支間)의 하나입니다.
중화 문화권인 한국의 선조들은 우주 만물과 인간사를 모두 주역(周易)의 음양오행으로 풀었습니다.

음양은 달(月)과 해(日)
오행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입니다. 이렇게 나열 해 보니 어서 많이 보던 한자죠? ㅎ 네, 월요일(月)부터 일요일(日)까지 일주일을 나타내는 한자입니다.

오랫만에 주역을 들춰내려니 새록새록합니다. ㅎㅎ
음양오행에서 해와 달에 해당하는 일(日)과 월(月)을 제외한 오행으로 모든 걸 해석합니다. 천체를 보면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그리고 오장육부의 오장(五臟)이 오행에 해당되어 목-간(肝), 화-심(心), 토-비(脾), 금-폐(肺), 수-신(腎)입니다.

재밌는 건 우리 이름에도 이 오행이 숨어있다는 사실입니다.
항열자를 정할 때 이 오행순으로 정합니다.
저희 할아버지 항렬이 화(和)로 목(木)이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항렬은 연(然)으로 화(火)가 있고 저는 교(教)로 토(土)자가 들어 있습니다.

복날 설명하다 너무 멀리 왔네..!! ㅋ

이런식으로 사계절을 대입하면 봄(春)-목(木), 여름(夏)-화(火), 가을(秋)-금(金), 겨울(冬)-수(水)가 되는데 하나가 남습니다. 토(土)..

그래서 이 토를 4계절 각각에 배치합니다.
365일을 4계절로 나누면 91일이 되는데 입동(立冬)부터 73일을 제외하고 소한(小寒)부터 입춘(立春)까지 18일을 토용(土用)으로 두었습니다. 이렇게 사계절이 시작되기 전 18일이 토용인데 여름의 토용(土用)에서 축(丑)의 날에 우나기(鰻)를 먹습니다. 축은 12지간의 하나이니 18일 안에 한번 있는 해도 두번 있는 해도 있게 됩니다.

오랫만에 주역을 떠올리니 사주(四柱)와 궁합(宮合)이 생각납니다. 제가 중학교 방학 때 아버지한테 한문을 배우면서 제일 먼저 배운게 육십갑자(六十甲子)와 궁합입니다. 지금도 명심보감 이전에 왜 그걸 가르치셨는지 아버지의 깊은 뜻이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ㅎ

기회되면 여러분도 봐 드릴께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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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
2021. 4. 27. 13:37 일상 日常/루슨 생각

청승이 아닌 고독으로
외로움이 아닌 여유로

빚쟁이가 아닌 자산가로
이방인이 아닌 사업가로

저는 물론 중간이겠지만 이는 느낌의 공존으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간단히 뒤집을 수 있습니다.
저는 대인 기피증을 경험하며 깨닳았습니다.

접시물에 코 박고(사업이 힘들어 지고) 제일 먼저 한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집을 세주고 세상(거리)으로 나간 행동이었습니다.

홈리스(Homeless)
세상에 내 한 몸 둘 곳이 없더군요. 철들기 전에는 아버지 집에서, 해외로 나온 뒤에도 홈스테이 3개월 이외에는 월세지만 내 방이 있었는데..

아침에 지하철역 코인 락카에 여행용 가방 넣어두고 일 끝나면 찾아서 지인 맨션의 게스트룸(일본 현대식 맨션에는 1개 집을 비워두고 손님이 오셨을 때 신청해서 쓰는 게스트룸으로 사용)을 전전했습니다.

전화도 안 받고 메일도 못 열어 봤습니다.
비난하고 재촉하는 메일 뿐이고 때로는 욕도 먹으며 새벽 2, 3시까지 일하고 다시 아침 일찍 출근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 심신이 쇠약해 지더군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동안 수입으로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다시 내 공간이 있어야겠다.

그래서 대충 챙겨 입고 부동산에 가서 제일 싼 방으로 찾아 달라며 기죽어서 물어 봐도 제대로 대답도 못했습니다. '내가 이러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거래처 사장의 도쿄 체재용 맨션에 묵을 때였습니다. 휴일 아침 초인종 소리에 두려워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세상에.. 천하의 루쓴이 대인 기피증인가?!'

저녁 무렵까지 꼼짝 못 하고 있다가 일어나 샤워하고 면도도 하고 양복 챙겨입고 다시 부동산으로 향했습니다.
"도쿄에서 젤 전망 좋은 방이나 젤 멋진 방으로 찾아 주세요!"
물론 지난번의 3배 범위 내에서 라는 상한선도 정해 줬습니다.

그 상황에 부공산 에이전시 직원보다 제가 스스로한테 더 놀랐습니다. 손발이 떨리던게 사라지고 여유와 농담 그리고 웃음과 자신감이 돌아 왔거든요. 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지금 사는 곳이 그때 마련한 방입니다.
주말에는 낮에도 스스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해서 야경보다는 멋진 방으로 선택했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메일은 그 뒤로도 근 일년간 맨 정신으로는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방을 구해서 우선 제가 먼저 안심하고 두번째 행동은 부모님을 안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입주하고 다음달 엄니 생신에 한국 가서 선물로 골프채 풀세트와 골프 가방에 엔화 지폐 백장(그래봐야 얼마 안 되지만) 바꿔서 흩어 넣어 드렸습니다.
회사 다니고 부터 손가락에 물집 잡히도록 돈 세게 해 드린다고 해서.. 그 스타트라는 의미에서..

그리고는 일본 돌아와 협력업체, 직원, 회사 그 다음에 저 개인 순으로 해결해 나갔습니다.

사람은 마음 먹기에 따라 상황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마음에 진심과 의지가 있고 그걸 실행하는 노력과 행동이 있으면 그리고 조바심 보다 기다리면 다시 찾아 온다는 걸..

돌아 오라고 손 짓하기 보다 노력하며 기다려야 겠습니다.

2014. 11. 26일 카스에 올린 글


힘들어도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았는데 요즘은 희망마저 상실해서 옛 글을 찾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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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
2020. 9. 6. 10:30 일상 日常/루슨 생각

오또-상
20년만에 펜을 듭니다.
아니 시대가 바뀌어 키보드인가요?
아니지 이젠 글을 쓸 때 스마트폰 액정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펜을 쓸 때도 키보드 칠 때도 간간히 기자 생활을 해서 표현이 좀 진부합니다.

제 유학시절 천하 고독 의지할 곳 없는 하늘 아래 유학 자금 빚지고 다음달 방세가 없어 주워다 고친 자전거 타고 한집 한집 아르바이트 구하냐고 물어 보고 다니느라 되지도 않는 일본말 할 때 찾아 와 주신 게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찾아 오셔서 연락하라고 전화번호하고 전화카드 손에 쥐어 주시고 간 날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니 너무 자주 생각해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때 한국에 다시 돌아 갈까봐 그게 두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내 능력을 키우고 싶다는 욕망 밖에 없었는데 그 새로운 세상이 그리 박한 줄 몰랐습니다.

대학 들어 가는 것도 유학생은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전화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시고 그 뒤로도..

20년 후에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매달 돈 보내 주신 거..

오또-상도 학자금 대출로 공부했다고 천천히 갚아도 된다고..

낳은 부모도 돈 한푼 안 보태는데 학비에 쓰라고 매달 꼬박꼬박.

그때는 머리 속이 멍했습니다.

대학 켐퍼스에선 이국인에 처자식 있는 나이 많은 후배인 제가 만든 봉사 클럽 사무실에서 외국인 유학생들하고 모두 수다 떠느라 시끄러울 때 저는 조용하고 전망 좋은 곳에 앉아서 오또-상 생각을 했습니다.

나한테 왜 이러시나?
어떻게 갚아야 하나..

살아 오면서 고민이 많아 일본 친구들한테 물어 보고 저희 엄니한테도 여쭤 봤습니다.
대답은 모두 받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 안 갚아도 된다고..
질문은 돈을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가 아니였는데..

그래서 그때부터는 스스로한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래서 그랬는지 타지에서 고생하는 유학생들 보살피고 도우면서 대학교에 봉사 클럽 만들어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았습니다.
비용도 만만치 않고 능력도 안 되지만 도쿄의 신생 국제 봉사단체 창립 맴버로 활동하면서 초년생인 제가 청소년 지원 사업 지구 임원까지 지내면서 노력했습니다.

오또-상한테 빚진 마음 갚으려고..

5년 전에 말레이시아로 떠나기 전에 찾아 뵀지요?
이젠 돈도 갚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찾아 갔습니다.

자주 찾아 뵙지 못 해 죄송하고
연락 드리지 못 해 죄송합니다.
제가 살아 오면서 마음이 너무 무거웠나 봅니다.

다른 이는 술 한잔 따라 주고 반갑게 맞이해도 자주 연락 드리는데 오또-상한테는 연락 드리지 못하고 생각에만 잠겼습니다.

제가 저희 아버지 제일 존경하는 것이 은혜를 잊지 않으신 다는 겁니다.

전 어렸을 때 명절 때마다 성묘 마치고 아버지 오른손에 댓병 청주를 그리고 왼손에는 제 손을 쥐고 아버지 외가 친척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분 덕에 우리집이 일어 났어. 사람은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단다.”

그때는 엄니 설명이 더 이해하기 편했습니다.
“아니 그냥 준 것도 아니고 필요 없어서 우리한테 판건데 왜 그걸 매번 술 사 들고 찾아 가요?”

그때까지 아버지는 소를 키워서 논 농사하고 밭농사를 일구셨는데 아버지 외가댁 의사 아저씨가 경운기 팔아 줘서 그 뒤로 매년 땅을 살 수 있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은인도 제 은인도 모두 의사네요.

5년 전에 일본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3년을 중국어 배우며 중국 사업 준비했는데 잘 안되서 가족이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시작하려고..

지금까지 일본에서 납부한 연금을 일시불로 받으면 갚을 수 있을꺼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찾아 뵙고 연금 사무실에 갔는데 한국은 전액 돌려 주는데 반해 일본은 반 밖에 안 준답니다.
제가 한국에서 재외국민으로 PR여권 받을 때 전부 돌려 받은 경험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뵐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그런 계획이라도 없었다면 못 찾아 뵀을테니..

오또-상
돌아 보면 덕분에 제 인생이 윤택했습니다.
잠 못 자고 제대로 못 먹으며 뛰어 다녔어도 덕분에 빚진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 보고 챙길 수 있었습니다.

저희 아들도 직장 들어 가 안정된 생활에 안주하기 전에 부모 돈만 쓰는 것보다 세상에 빚지고 사는 게 아들 인생을 위해 더 도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게 또 쉽지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을 쓰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지난 20년간 오또-상 생각하며 참았던 게 다 터지나 봅니다.

오또-상이 데려 가 주신 맛집에서 식사 마치고 헤어질 때 벤치에서 외국 나가도 몸 조심하고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하신 말씀도 가끔 생각합니다.

꼭 건강하세요.

얼마 전 전화 목소리 듣고 안심했습니다.
코로나 터지고 계속 걱정했거든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고..

병원 신축하시고 아드님도 잘 하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마스크하고 일본에서 일반 사람들은 구하기 힘든 소독 티슈 챙겨서 보내 드렸습니다.
매년 뭘 보내 드릴까 생각만 하고 아직은 부끄러운 마음에 행동은 못 했는데 혹시 오또-상 없는 하늘을 지고 살까봐 덜컥 겁이 났나 봅니다.

친구 아버님이 6년 전 쯤 돌아 가셨습니다.
그집 딸이 제 후배하고 사귀어서 처음 인사 드리러 갈 때 후배 부탁으로 제가 통역으로 갔다가 친해졌습니다.
그 뒤로 찾아 뵐때마다 저를 숨겨논 아들이라고 농담하시며 아들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돌아 가시기 전에 문병 가려고 연락하니 오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루슨한테는 내 건강한 모습만 기억에 넘겨 주고 싶다고..

장례식에 가고 3주기에도 참석했는데 가족석에 앉아서 왠지 저만 제대로 대화에 참가하지 못 했습니다.

모두 돌아 가고 역전 편의점에서 청주 사서 다시 되돌아 갔습니다. 그렇게 묘지 앞에 술잔 두개 놓고 펑펑 울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 동안 사요나라 그 한마디 못 했다는 걸..

가족들은 모두 떠나 보냈는데 그동안 제 맘 속에선 간직하고 있었더라고요. 그날 비로소 보내 드렸습니다.

제가 오또-상을 평생 보내 드리지 못 하고 살게 하지 않으시려면 건강하게 오래 계세요.

호주에서 공부하던 우리 아들 이번 코로나 사태 맞아 외국 영주권자라 안 가도 되는 군대 보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공부도 제대로 못 할 뿐더러 앞으로 살아 갈 아들 인생을 위해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도 되는데 장손이니 할아버지가 백년을 살고 돌아 가시면 매년 술 한잔 따라 드려야 하니 대한민국 국적만은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약속했거든요.

우리 아들 제대하면 같이 찾아 뵙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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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