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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태어나 집은 페낭이고 도쿄에서 일하는 루슨(여권 미들네임)이 써 가는 블로그입니다. #Korea #Penang #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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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27. 13:37 일상 日常/루슨 생각

청승이 아닌 고독으로
외로움이 아닌 여유로

빚쟁이가 아닌 자산가로
이방인이 아닌 사업가로

저는 물론 중간이겠지만 이는 느낌의 공존으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간단히 뒤집을 수 있습니다.
저는 대인 기피증을 경험하며 깨닳았습니다.

접시물에 코 박고(사업이 힘들어 지고) 제일 먼저 한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집을 세주고 세상(거리)으로 나간 행동이었습니다.

홈리스(Homeless)
세상에 내 한 몸 둘 곳이 없더군요. 철들기 전에는 아버지 집에서, 해외로 나온 뒤에도 홈스테이 3개월 이외에는 월세지만 내 방이 있었는데..

아침에 지하철역 코인 락카에 여행용 가방 넣어두고 일 끝나면 찾아서 지인 맨션의 게스트룸(일본 현대식 맨션에는 1개 집을 비워두고 손님이 오셨을 때 신청해서 쓰는 게스트룸으로 사용)을 전전했습니다.

전화도 안 받고 메일도 못 열어 봤습니다.
비난하고 재촉하는 메일 뿐이고 때로는 욕도 먹으며 새벽 2, 3시까지 일하고 다시 아침 일찍 출근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 심신이 쇠약해 지더군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동안 수입으로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다시 내 공간이 있어야겠다.

그래서 대충 챙겨 입고 부동산에 가서 제일 싼 방으로 찾아 달라며 기죽어서 물어 봐도 제대로 대답도 못했습니다. '내가 이러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거래처 사장의 도쿄 체재용 맨션에 묵을 때였습니다. 휴일 아침 초인종 소리에 두려워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세상에.. 천하의 루쓴이 대인 기피증인가?!'

저녁 무렵까지 꼼짝 못 하고 있다가 일어나 샤워하고 면도도 하고 양복 챙겨입고 다시 부동산으로 향했습니다.
"도쿄에서 젤 전망 좋은 방이나 젤 멋진 방으로 찾아 주세요!"
물론 지난번의 3배 범위 내에서 라는 상한선도 정해 줬습니다.

그 상황에 부공산 에이전시 직원보다 제가 스스로한테 더 놀랐습니다. 손발이 떨리던게 사라지고 여유와 농담 그리고 웃음과 자신감이 돌아 왔거든요. 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지금 사는 곳이 그때 마련한 방입니다.
주말에는 낮에도 스스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해서 야경보다는 멋진 방으로 선택했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메일은 그 뒤로도 근 일년간 맨 정신으로는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방을 구해서 우선 제가 먼저 안심하고 두번째 행동은 부모님을 안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입주하고 다음달 엄니 생신에 한국 가서 선물로 골프채 풀세트와 골프 가방에 엔화 지폐 백장(그래봐야 얼마 안 되지만) 바꿔서 흩어 넣어 드렸습니다.
회사 다니고 부터 손가락에 물집 잡히도록 돈 세게 해 드린다고 해서.. 그 스타트라는 의미에서..

그리고는 일본 돌아와 협력업체, 직원, 회사 그 다음에 저 개인 순으로 해결해 나갔습니다.

사람은 마음 먹기에 따라 상황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마음에 진심과 의지가 있고 그걸 실행하는 노력과 행동이 있으면 그리고 조바심 보다 기다리면 다시 찾아 온다는 걸..

돌아 오라고 손 짓하기 보다 노력하며 기다려야 겠습니다.

2014. 11. 26일 카스에 올린 글


힘들어도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았는데 요즘은 희망마저 상실해서 옛 글을 찾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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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
2020. 9. 6. 10:30 일상 日常/루슨 생각

오또-상
20년만에 펜을 듭니다.
아니 시대가 바뀌어 키보드인가요?
아니지 이젠 글을 쓸 때 스마트폰 액정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펜을 쓸 때도 키보드 칠 때도 간간히 기자 생활을 해서 표현이 좀 진부합니다.

제 유학시절 천하 고독 의지할 곳 없는 하늘 아래 유학 자금 빚지고 다음달 방세가 없어 주워다 고친 자전거 타고 한집 한집 아르바이트 구하냐고 물어 보고 다니느라 되지도 않는 일본말 할 때 찾아 와 주신 게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찾아 오셔서 연락하라고 전화번호하고 전화카드 손에 쥐어 주시고 간 날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니 너무 자주 생각해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때 한국에 다시 돌아 갈까봐 그게 두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내 능력을 키우고 싶다는 욕망 밖에 없었는데 그 새로운 세상이 그리 박한 줄 몰랐습니다.

대학 들어 가는 것도 유학생은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전화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시고 그 뒤로도..

20년 후에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매달 돈 보내 주신 거..

오또-상도 학자금 대출로 공부했다고 천천히 갚아도 된다고..

낳은 부모도 돈 한푼 안 보태는데 학비에 쓰라고 매달 꼬박꼬박.

그때는 머리 속이 멍했습니다.

대학 켐퍼스에선 이국인에 처자식 있는 나이 많은 후배인 제가 만든 봉사 클럽 사무실에서 외국인 유학생들하고 모두 수다 떠느라 시끄러울 때 저는 조용하고 전망 좋은 곳에 앉아서 오또-상 생각을 했습니다.

나한테 왜 이러시나?
어떻게 갚아야 하나..

살아 오면서 고민이 많아 일본 친구들한테 물어 보고 저희 엄니한테도 여쭤 봤습니다.
대답은 모두 받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 안 갚아도 된다고..
질문은 돈을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가 아니였는데..

그래서 그때부터는 스스로한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래서 그랬는지 타지에서 고생하는 유학생들 보살피고 도우면서 대학교에 봉사 클럽 만들어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았습니다.
비용도 만만치 않고 능력도 안 되지만 도쿄의 신생 국제 봉사단체 창립 맴버로 활동하면서 초년생인 제가 청소년 지원 사업 지구 임원까지 지내면서 노력했습니다.

오또-상한테 빚진 마음 갚으려고..

5년 전에 말레이시아로 떠나기 전에 찾아 뵀지요?
이젠 돈도 갚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찾아 갔습니다.

자주 찾아 뵙지 못 해 죄송하고
연락 드리지 못 해 죄송합니다.
제가 살아 오면서 마음이 너무 무거웠나 봅니다.

다른 이는 술 한잔 따라 주고 반갑게 맞이해도 자주 연락 드리는데 오또-상한테는 연락 드리지 못하고 생각에만 잠겼습니다.

제가 저희 아버지 제일 존경하는 것이 은혜를 잊지 않으신 다는 겁니다.

전 어렸을 때 명절 때마다 성묘 마치고 아버지 오른손에 댓병 청주를 그리고 왼손에는 제 손을 쥐고 아버지 외가 친척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분 덕에 우리집이 일어 났어. 사람은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단다.”

그때는 엄니 설명이 더 이해하기 편했습니다.
“아니 그냥 준 것도 아니고 필요 없어서 우리한테 판건데 왜 그걸 매번 술 사 들고 찾아 가요?”

그때까지 아버지는 소를 키워서 논 농사하고 밭농사를 일구셨는데 아버지 외가댁 의사 아저씨가 경운기 팔아 줘서 그 뒤로 매년 땅을 살 수 있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은인도 제 은인도 모두 의사네요.

5년 전에 일본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3년을 중국어 배우며 중국 사업 준비했는데 잘 안되서 가족이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시작하려고..

지금까지 일본에서 납부한 연금을 일시불로 받으면 갚을 수 있을꺼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찾아 뵙고 연금 사무실에 갔는데 한국은 전액 돌려 주는데 반해 일본은 반 밖에 안 준답니다.
제가 한국에서 재외국민으로 PR여권 받을 때 전부 돌려 받은 경험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뵐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그런 계획이라도 없었다면 못 찾아 뵀을테니..

오또-상
돌아 보면 덕분에 제 인생이 윤택했습니다.
잠 못 자고 제대로 못 먹으며 뛰어 다녔어도 덕분에 빚진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 보고 챙길 수 있었습니다.

저희 아들도 직장 들어 가 안정된 생활에 안주하기 전에 부모 돈만 쓰는 것보다 세상에 빚지고 사는 게 아들 인생을 위해 더 도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게 또 쉽지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을 쓰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지난 20년간 오또-상 생각하며 참았던 게 다 터지나 봅니다.

오또-상이 데려 가 주신 맛집에서 식사 마치고 헤어질 때 벤치에서 외국 나가도 몸 조심하고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하신 말씀도 가끔 생각합니다.

꼭 건강하세요.

얼마 전 전화 목소리 듣고 안심했습니다.
코로나 터지고 계속 걱정했거든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고..

병원 신축하시고 아드님도 잘 하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마스크하고 일본에서 일반 사람들은 구하기 힘든 소독 티슈 챙겨서 보내 드렸습니다.
매년 뭘 보내 드릴까 생각만 하고 아직은 부끄러운 마음에 행동은 못 했는데 혹시 오또-상 없는 하늘을 지고 살까봐 덜컥 겁이 났나 봅니다.

친구 아버님이 6년 전 쯤 돌아 가셨습니다.
그집 딸이 제 후배하고 사귀어서 처음 인사 드리러 갈 때 후배 부탁으로 제가 통역으로 갔다가 친해졌습니다.
그 뒤로 찾아 뵐때마다 저를 숨겨논 아들이라고 농담하시며 아들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돌아 가시기 전에 문병 가려고 연락하니 오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루슨한테는 내 건강한 모습만 기억에 넘겨 주고 싶다고..

장례식에 가고 3주기에도 참석했는데 가족석에 앉아서 왠지 저만 제대로 대화에 참가하지 못 했습니다.

모두 돌아 가고 역전 편의점에서 청주 사서 다시 되돌아 갔습니다. 그렇게 묘지 앞에 술잔 두개 놓고 펑펑 울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 동안 사요나라 그 한마디 못 했다는 걸..

가족들은 모두 떠나 보냈는데 그동안 제 맘 속에선 간직하고 있었더라고요. 그날 비로소 보내 드렸습니다.

제가 오또-상을 평생 보내 드리지 못 하고 살게 하지 않으시려면 건강하게 오래 계세요.

호주에서 공부하던 우리 아들 이번 코로나 사태 맞아 외국 영주권자라 안 가도 되는 군대 보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공부도 제대로 못 할 뿐더러 앞으로 살아 갈 아들 인생을 위해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도 되는데 장손이니 할아버지가 백년을 살고 돌아 가시면 매년 술 한잔 따라 드려야 하니 대한민국 국적만은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약속했거든요.

우리 아들 제대하면 같이 찾아 뵙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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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
2020. 8. 21. 21:47 일상 日常/루슨 생각


다행이다.
퇴근길 집근처 전철역에 내릴 때 쯤 손바닥 가려운 건 이제 괜찮네..

아침을 안 먹어 점심을 좀 일찍. 그래서 5시만 되도 배가 고파 오는데 더워서 그런가 요즘들어 너무 피곤하고 더 배고픈 것 같고..
코로나도 위험하니 집에 가서 먹어야 하는데 기운이 없어 회사 근처에서 매운 동코츠 라멘에 김치하고 사케.

매번 먹는 조합인데 오늘은 여기 저기 긁다가..
설마!!

손바닥이 가려워서 빨리 계산하고 나왔는데 혀 밑이 붓는 느낌.

어떻하지.. 어떻하지..
집사람 연주할 시간이라 연락도 안되는데..
어떻하지..
전철 타러 못 가고 안절부절.

전철에서 약 먹어야 할지 모르니까 일단 편의점에서 물부터 사고..
전철에서 쓰러진 사람 많이 봤는데 역무원이 바로 달려 와서 구급차 불러 주니 괜찮겠지?
그렇게 귀가 전철 탑승.

처음 알러지 증상이 나타난 건 4년 전 쯤 유제품 알러지였습니다.
매일 아침 사무실에서 카페라떼인지 카푸치노인지 캔커피 하나씩 마셨는데 2주쯤 지나니까 몸이 가렵고 명치가 답답하고 아팠습니다.

그때 제가 어려서부터 빵과 우유를 잘 못 먹은 이유를 알았습니다. 유제품 알러지가 있는데 그동안 증상이 안 나타나 그냥 좋아하지 않는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이게 나이 들어 나타날 수도 있구나..

그 뒤로 먹다가 긁어도 저는 생각 없이 먹는데 집사람이 먼저 눈치 채고 먹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이런 건 둔하구나..’

유제품만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어느날 밥 먹다가 손바닥이 가렵기 시작해 혀 밑이 좀 불편해 지더니 온 몸이 가려워서 옷을 다 벗고 침실에서 에어컨하고 선풍기 틀어 두고 여기 저기 긁기 시작.

안되겠다 싶어 당시 한국에 있던 아내한테 전화하니 약국에 가면 알러지 약이 있다고 해서 약 사 먹고 가라 앉았습니다. 알러지 약도 있구나 그때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어떤 곡식이 많이 든 죽 먹었을 때하고 출근길에 잴리형 건강 음료 마셨을 때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 회사에 못 간다 연락하고 집으로 되돌아 온 뒤로 밖에 나갈 때 알러지 약이 없으면 불안해서 꼭 챙겨 다니게 되었습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기지?

하루는 여느 때처럼 엄니가 보내 주신 김치로 찌개 끓여 먹는데 가족 중에 저만 또 알러지 증상. 그런데 이번엔 너무 심해서 약 먹고 바로 침대에 누웠는데 혀하고 식도는 붓고 복통이 심해서 배 움켜 잡고 있는데 집사람이 구급차 부르자는 빠른 판단에 또 한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아파도 약을 안 먹고 일단 참고 보는 제 습관이 알러지를 만나고 아내가 곁에 없었으면 큰일 날뻔했습니다.

서로 당황한데다 집사람은 일본어도 서툰데 다행히 딸이 바로 전화해 걸어서 3분 거리의 소방서에서 구급차 도착.
그렇지만 저는 복통 때문에 일어나지 못 해 소방대원들이 침실로 들어 와 들것으로 옮기고 구급차에선 호흡 곤란 때문에 우선 산소 호흡기부터 채우고 출발. 딸이 구급차에 같이 타고 집사람은 제 차 운전해서 구급차 따라 이동.

이동 중에는 소방대원이 병원에 연락하면서 다른 대원은 신원 파악하고 증세 물어 보는데 제가 혀하고 식도가 부어서 말을 제대로 못 하는 데다 딸은 우느냐고 대답을 못 해서 소방대원이 병원에..
환자가 한국사람인데 환자와 보호자 모두 일본어를 못 한다고 보고하는 게 들렸습니다.

우선 딸부터 안심시켜야 겠다는 생각에..
“아빠 괜찮아. 울지 마..”

그리고 내가 또 언제 구급차 타 보겠냐는 생각에..
“아빠 사진 찍어 봐.”
결국 또 한번 신세졌지만..

그래도 우리 딸은 발음이 꼬여도 잘 알아 듣네.. ㅎ

구급차에서 토하고 병원 도착해서 주사 맞고 피 검사하고 링거 꽂고 잠 들었다 깨어 보니 혀만 아직 불편하고 나머지는 괜찮아 퇴원. 근데 병원비가 무려.. ㅠ

이렇게 딸하고 집사람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아프면 미련 곰탱이처럼 버티는 저하고는 달리 바로 방법을 알려 주니 알러지 증상이 나타나면 이제 아내한테 연락부터 합니다.

가려움도 너무 심해서 다 벗고 온몸을 긁어도 참기 힘든데 혀하고 식도가 붓기 시작하면 혼자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덜컥 겁부터 납니다.

그래도 오늘은 심하지 않아 다행이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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