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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태어나 집은 페낭이고 도쿄에서 일하는 루슨(여권 미들네임)이 써 가는 블로그입니다. #Korea #Penang #Tokyo
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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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日常'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21.04.27 대인 기피증에서 나를 구한 방(房) 1
  2. 2020.09.06 お父さん 3
  3. 2020.08.21 이놈의 알러지
  4. 2020.07.14 고독 그리고 행복
  5. 2019.11.06 경기도 사투리
  6. 2019.03.19 지천명(知天命)은 개 뿔
  7. 2019.02.15 공항 데이트
  8. 2018.07.18 Privacy
  9. 2018.04.17 ​우리 술 청주(清酒)
  10. 2017.12.23 운명이려니..
2021. 4. 27. 13:37 일상 日常/루슨 생각

청승이 아닌 고독으로
외로움이 아닌 여유로

빚쟁이가 아닌 자산가로
이방인이 아닌 사업가로

저는 물론 중간이겠지만 이는 느낌의 공존으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간단히 뒤집을 수 있습니다.
저는 대인 기피증을 경험하며 깨닳았습니다.

접시물에 코 박고(사업이 힘들어 지고) 제일 먼저 한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집을 세주고 세상(거리)으로 나간 행동이었습니다.

홈리스(Homeless)
세상에 내 한 몸 둘 곳이 없더군요. 철들기 전에는 아버지 집에서, 해외로 나온 뒤에도 홈스테이 3개월 이외에는 월세지만 내 방이 있었는데..

아침에 지하철역 코인 락카에 여행용 가방 넣어두고 일 끝나면 찾아서 지인 맨션의 게스트룸(일본 현대식 맨션에는 1개 집을 비워두고 손님이 오셨을 때 신청해서 쓰는 게스트룸으로 사용)을 전전했습니다.

전화도 안 받고 메일도 못 열어 봤습니다.
비난하고 재촉하는 메일 뿐이고 때로는 욕도 먹으며 새벽 2, 3시까지 일하고 다시 아침 일찍 출근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 심신이 쇠약해 지더군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동안 수입으로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다시 내 공간이 있어야겠다.

그래서 대충 챙겨 입고 부동산에 가서 제일 싼 방으로 찾아 달라며 기죽어서 물어 봐도 제대로 대답도 못했습니다. '내가 이러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거래처 사장의 도쿄 체재용 맨션에 묵을 때였습니다. 휴일 아침 초인종 소리에 두려워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세상에.. 천하의 루쓴이 대인 기피증인가?!'

저녁 무렵까지 꼼짝 못 하고 있다가 일어나 샤워하고 면도도 하고 양복 챙겨입고 다시 부동산으로 향했습니다.
"도쿄에서 젤 전망 좋은 방이나 젤 멋진 방으로 찾아 주세요!"
물론 지난번의 3배 범위 내에서 라는 상한선도 정해 줬습니다.

그 상황에 부공산 에이전시 직원보다 제가 스스로한테 더 놀랐습니다. 손발이 떨리던게 사라지고 여유와 농담 그리고 웃음과 자신감이 돌아 왔거든요. 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지금 사는 곳이 그때 마련한 방입니다.
주말에는 낮에도 스스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해서 야경보다는 멋진 방으로 선택했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메일은 그 뒤로도 근 일년간 맨 정신으로는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방을 구해서 우선 제가 먼저 안심하고 두번째 행동은 부모님을 안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입주하고 다음달 엄니 생신에 한국 가서 선물로 골프채 풀세트와 골프 가방에 엔화 지폐 백장(그래봐야 얼마 안 되지만) 바꿔서 흩어 넣어 드렸습니다.
회사 다니고 부터 손가락에 물집 잡히도록 돈 세게 해 드린다고 해서.. 그 스타트라는 의미에서..

그리고는 일본 돌아와 협력업체, 직원, 회사 그 다음에 저 개인 순으로 해결해 나갔습니다.

사람은 마음 먹기에 따라 상황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마음에 진심과 의지가 있고 그걸 실행하는 노력과 행동이 있으면 그리고 조바심 보다 기다리면 다시 찾아 온다는 걸..

돌아 오라고 손 짓하기 보다 노력하며 기다려야 겠습니다.

2014. 11. 26일 카스에 올린 글


힘들어도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았는데 요즘은 희망마저 상실해서 옛 글을 찾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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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
2020. 9. 6. 10:30 일상 日常/루슨 생각

오또-상
20년만에 펜을 듭니다.
아니 시대가 바뀌어 키보드인가요?
아니지 이젠 글을 쓸 때 스마트폰 액정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펜을 쓸 때도 키보드 칠 때도 간간히 기자 생활을 해서 표현이 좀 진부합니다.

제 유학시절 천하 고독 의지할 곳 없는 하늘 아래 유학 자금 빚지고 다음달 방세가 없어 주워다 고친 자전거 타고 한집 한집 아르바이트 구하냐고 물어 보고 다니느라 되지도 않는 일본말 할 때 찾아 와 주신 게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찾아 오셔서 연락하라고 전화번호하고 전화카드 손에 쥐어 주시고 간 날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니 너무 자주 생각해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때 한국에 다시 돌아 갈까봐 그게 두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내 능력을 키우고 싶다는 욕망 밖에 없었는데 그 새로운 세상이 그리 박한 줄 몰랐습니다.

대학 들어 가는 것도 유학생은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전화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시고 그 뒤로도..

20년 후에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매달 돈 보내 주신 거..

오또-상도 학자금 대출로 공부했다고 천천히 갚아도 된다고..

낳은 부모도 돈 한푼 안 보태는데 학비에 쓰라고 매달 꼬박꼬박.

그때는 머리 속이 멍했습니다.

대학 켐퍼스에선 이국인에 처자식 있는 나이 많은 후배인 제가 만든 봉사 클럽 사무실에서 외국인 유학생들하고 모두 수다 떠느라 시끄러울 때 저는 조용하고 전망 좋은 곳에 앉아서 오또-상 생각을 했습니다.

나한테 왜 이러시나?
어떻게 갚아야 하나..

살아 오면서 고민이 많아 일본 친구들한테 물어 보고 저희 엄니한테도 여쭤 봤습니다.
대답은 모두 받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 안 갚아도 된다고..
질문은 돈을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가 아니였는데..

그래서 그때부터는 스스로한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래서 그랬는지 타지에서 고생하는 유학생들 보살피고 도우면서 대학교에 봉사 클럽 만들어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았습니다.
비용도 만만치 않고 능력도 안 되지만 도쿄의 신생 국제 봉사단체 창립 맴버로 활동하면서 초년생인 제가 청소년 지원 사업 지구 임원까지 지내면서 노력했습니다.

오또-상한테 빚진 마음 갚으려고..

5년 전에 말레이시아로 떠나기 전에 찾아 뵀지요?
이젠 돈도 갚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찾아 갔습니다.

자주 찾아 뵙지 못 해 죄송하고
연락 드리지 못 해 죄송합니다.
제가 살아 오면서 마음이 너무 무거웠나 봅니다.

다른 이는 술 한잔 따라 주고 반갑게 맞이해도 자주 연락 드리는데 오또-상한테는 연락 드리지 못하고 생각에만 잠겼습니다.

제가 저희 아버지 제일 존경하는 것이 은혜를 잊지 않으신 다는 겁니다.

전 어렸을 때 명절 때마다 성묘 마치고 아버지 오른손에 댓병 청주를 그리고 왼손에는 제 손을 쥐고 아버지 외가 친척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분 덕에 우리집이 일어 났어. 사람은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단다.”

그때는 엄니 설명이 더 이해하기 편했습니다.
“아니 그냥 준 것도 아니고 필요 없어서 우리한테 판건데 왜 그걸 매번 술 사 들고 찾아 가요?”

그때까지 아버지는 소를 키워서 논 농사하고 밭농사를 일구셨는데 아버지 외가댁 의사 아저씨가 경운기 팔아 줘서 그 뒤로 매년 땅을 살 수 있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은인도 제 은인도 모두 의사네요.

5년 전에 일본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3년을 중국어 배우며 중국 사업 준비했는데 잘 안되서 가족이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시작하려고..

지금까지 일본에서 납부한 연금을 일시불로 받으면 갚을 수 있을꺼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찾아 뵙고 연금 사무실에 갔는데 한국은 전액 돌려 주는데 반해 일본은 반 밖에 안 준답니다.
제가 한국에서 재외국민으로 PR여권 받을 때 전부 돌려 받은 경험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뵐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그런 계획이라도 없었다면 못 찾아 뵀을테니..

오또-상
돌아 보면 덕분에 제 인생이 윤택했습니다.
잠 못 자고 제대로 못 먹으며 뛰어 다녔어도 덕분에 빚진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 보고 챙길 수 있었습니다.

저희 아들도 직장 들어 가 안정된 생활에 안주하기 전에 부모 돈만 쓰는 것보다 세상에 빚지고 사는 게 아들 인생을 위해 더 도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게 또 쉽지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을 쓰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지난 20년간 오또-상 생각하며 참았던 게 다 터지나 봅니다.

오또-상이 데려 가 주신 맛집에서 식사 마치고 헤어질 때 벤치에서 외국 나가도 몸 조심하고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하신 말씀도 가끔 생각합니다.

꼭 건강하세요.

얼마 전 전화 목소리 듣고 안심했습니다.
코로나 터지고 계속 걱정했거든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고..

병원 신축하시고 아드님도 잘 하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마스크하고 일본에서 일반 사람들은 구하기 힘든 소독 티슈 챙겨서 보내 드렸습니다.
매년 뭘 보내 드릴까 생각만 하고 아직은 부끄러운 마음에 행동은 못 했는데 혹시 오또-상 없는 하늘을 지고 살까봐 덜컥 겁이 났나 봅니다.

친구 아버님이 6년 전 쯤 돌아 가셨습니다.
그집 딸이 제 후배하고 사귀어서 처음 인사 드리러 갈 때 후배 부탁으로 제가 통역으로 갔다가 친해졌습니다.
그 뒤로 찾아 뵐때마다 저를 숨겨논 아들이라고 농담하시며 아들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돌아 가시기 전에 문병 가려고 연락하니 오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루슨한테는 내 건강한 모습만 기억에 넘겨 주고 싶다고..

장례식에 가고 3주기에도 참석했는데 가족석에 앉아서 왠지 저만 제대로 대화에 참가하지 못 했습니다.

모두 돌아 가고 역전 편의점에서 청주 사서 다시 되돌아 갔습니다. 그렇게 묘지 앞에 술잔 두개 놓고 펑펑 울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 동안 사요나라 그 한마디 못 했다는 걸..

가족들은 모두 떠나 보냈는데 그동안 제 맘 속에선 간직하고 있었더라고요. 그날 비로소 보내 드렸습니다.

제가 오또-상을 평생 보내 드리지 못 하고 살게 하지 않으시려면 건강하게 오래 계세요.

호주에서 공부하던 우리 아들 이번 코로나 사태 맞아 외국 영주권자라 안 가도 되는 군대 보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공부도 제대로 못 할 뿐더러 앞으로 살아 갈 아들 인생을 위해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도 되는데 장손이니 할아버지가 백년을 살고 돌아 가시면 매년 술 한잔 따라 드려야 하니 대한민국 국적만은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약속했거든요.

우리 아들 제대하면 같이 찾아 뵙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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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
2020. 8. 21. 21:47 일상 日常/루슨 생각


다행이다.
퇴근길 집근처 전철역에 내릴 때 쯤 손바닥 가려운 건 이제 괜찮네..

아침을 안 먹어 점심을 좀 일찍. 그래서 5시만 되도 배가 고파 오는데 더워서 그런가 요즘들어 너무 피곤하고 더 배고픈 것 같고..
코로나도 위험하니 집에 가서 먹어야 하는데 기운이 없어 회사 근처에서 매운 동코츠 라멘에 김치하고 사케.

매번 먹는 조합인데 오늘은 여기 저기 긁다가..
설마!!

손바닥이 가려워서 빨리 계산하고 나왔는데 혀 밑이 붓는 느낌.

어떻하지.. 어떻하지..
집사람 연주할 시간이라 연락도 안되는데..
어떻하지..
전철 타러 못 가고 안절부절.

전철에서 약 먹어야 할지 모르니까 일단 편의점에서 물부터 사고..
전철에서 쓰러진 사람 많이 봤는데 역무원이 바로 달려 와서 구급차 불러 주니 괜찮겠지?
그렇게 귀가 전철 탑승.

처음 알러지 증상이 나타난 건 4년 전 쯤 유제품 알러지였습니다.
매일 아침 사무실에서 카페라떼인지 카푸치노인지 캔커피 하나씩 마셨는데 2주쯤 지나니까 몸이 가렵고 명치가 답답하고 아팠습니다.

그때 제가 어려서부터 빵과 우유를 잘 못 먹은 이유를 알았습니다. 유제품 알러지가 있는데 그동안 증상이 안 나타나 그냥 좋아하지 않는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이게 나이 들어 나타날 수도 있구나..

그 뒤로 먹다가 긁어도 저는 생각 없이 먹는데 집사람이 먼저 눈치 채고 먹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이런 건 둔하구나..’

유제품만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어느날 밥 먹다가 손바닥이 가렵기 시작해 혀 밑이 좀 불편해 지더니 온 몸이 가려워서 옷을 다 벗고 침실에서 에어컨하고 선풍기 틀어 두고 여기 저기 긁기 시작.

안되겠다 싶어 당시 한국에 있던 아내한테 전화하니 약국에 가면 알러지 약이 있다고 해서 약 사 먹고 가라 앉았습니다. 알러지 약도 있구나 그때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어떤 곡식이 많이 든 죽 먹었을 때하고 출근길에 잴리형 건강 음료 마셨을 때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 회사에 못 간다 연락하고 집으로 되돌아 온 뒤로 밖에 나갈 때 알러지 약이 없으면 불안해서 꼭 챙겨 다니게 되었습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기지?

하루는 여느 때처럼 엄니가 보내 주신 김치로 찌개 끓여 먹는데 가족 중에 저만 또 알러지 증상. 그런데 이번엔 너무 심해서 약 먹고 바로 침대에 누웠는데 혀하고 식도는 붓고 복통이 심해서 배 움켜 잡고 있는데 집사람이 구급차 부르자는 빠른 판단에 또 한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아파도 약을 안 먹고 일단 참고 보는 제 습관이 알러지를 만나고 아내가 곁에 없었으면 큰일 날뻔했습니다.

서로 당황한데다 집사람은 일본어도 서툰데 다행히 딸이 바로 전화해 걸어서 3분 거리의 소방서에서 구급차 도착.
그렇지만 저는 복통 때문에 일어나지 못 해 소방대원들이 침실로 들어 와 들것으로 옮기고 구급차에선 호흡 곤란 때문에 우선 산소 호흡기부터 채우고 출발. 딸이 구급차에 같이 타고 집사람은 제 차 운전해서 구급차 따라 이동.

이동 중에는 소방대원이 병원에 연락하면서 다른 대원은 신원 파악하고 증세 물어 보는데 제가 혀하고 식도가 부어서 말을 제대로 못 하는 데다 딸은 우느냐고 대답을 못 해서 소방대원이 병원에..
환자가 한국사람인데 환자와 보호자 모두 일본어를 못 한다고 보고하는 게 들렸습니다.

우선 딸부터 안심시켜야 겠다는 생각에..
“아빠 괜찮아. 울지 마..”

그리고 내가 또 언제 구급차 타 보겠냐는 생각에..
“아빠 사진 찍어 봐.”
결국 또 한번 신세졌지만..

그래도 우리 딸은 발음이 꼬여도 잘 알아 듣네.. ㅎ

구급차에서 토하고 병원 도착해서 주사 맞고 피 검사하고 링거 꽂고 잠 들었다 깨어 보니 혀만 아직 불편하고 나머지는 괜찮아 퇴원. 근데 병원비가 무려.. ㅠ

이렇게 딸하고 집사람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아프면 미련 곰탱이처럼 버티는 저하고는 달리 바로 방법을 알려 주니 알러지 증상이 나타나면 이제 아내한테 연락부터 합니다.

가려움도 너무 심해서 다 벗고 온몸을 긁어도 참기 힘든데 혀하고 식도가 붓기 시작하면 혼자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덜컥 겁부터 납니다.

그래도 오늘은 심하지 않아 다행이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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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
2020. 7. 14. 08:26 일상 日常/루슨 생각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의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정호승《수선화에게》

고독은 열등감과 함께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심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대단히 고통받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고독을 겪는 사람은 우울과 소외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언제나 곁에 누군가 있던 사람은 절대 느끼지 못 할 감정입니다.

제 인생 최고의 고독은 기러기 시절이었습니다.
집 사고 사업 시작했는데 1년도 안되 동일본 대지진에 방사능.

사업 초기 빚만 늘어 가는데 집은 세 주고 가족을 피난 보내고 나니 돈이 없어 홈리스로 잠 잘 곳을 찾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돈 모아 원룸을 얻었어도 아들 근처에서 살고 싶어 쿠알라룸푸르로 가기 전까지는 줄곧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고독의 사전 뜻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입니다.

고독이란 말은 맹자(孟子)에서 양나라 혜왕의 장구 하편(梁惠王章句 下)에 나오는

老而無妻曰‘鰥’. 老而無夫曰‘寡’. 幼而無父曰‘孤’. 老而無子曰‘獨’. 此四者, 天下之窮民而無告者. 文王發政施仁, 必先斯四者.

“늙어서 아내가 없는 이를 ‘환鰥’이라 하고, 늙어서 남편이 없는 이를 ‘과寡’라 하며, 어려서 의지할 부모가 없는 이를 ‘고孤’라 하고, 늙어서 자식이 없는 이를 ‘독獨’이라 합니다. 이 네 분류의 사람들은 천하의 궁핍한 백성들로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문왕께서 정치를 시작하고 인정을 베푸실 때 반드시 이 네 사람들로부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고독의 어원은 환과고독(鰥寡孤獨)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시절 사업은 고꾸라져 주위에는 돈 달라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들 뿐이고 그래도 베트남 사무실 경비 보내고 유학 중인 가족 생활비 보내면서 낮에는 남의 회사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밤에는 내 회사 일 처리하면서 새벽 3, 4시가 되야 양주 들이키고 겨우 잠 들 수 있었습니다.

바쁜 생활 속에 고독은 사치일꺼란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무너지는 이유가 힘들어서가 아니고 위로 받지 못해서”란 말을 실감하며 위로 받고 싶었고 누군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빚을 다 갚을 때까지는 그렇게 혼자 숨어 지냈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친구다 취미다 봉사활동이다 주말이면 바빴던 제가 혼자서 그렇게 집에만 갖혀 살기 시작 한 때가..

바쁘게 살면서도 주말마다 주민 문화센터에서 하는 수채화 교실에 나가 그림 그리고 원룸에서 요리 만들어 SNS에 올려 소통하고 글 쓰면서 괴로울 땐 탈북자들의 목숨 건 탈북 스토리 방송 찾아 보며 눈물 흘리며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제 인생의 대부분의 글을 그때 쓴 것 같습니다.

그 SNS에 올린 요리 사진을 보셨는지..
집에만 다녀 가시면 며느리 욕하고 행복할 땐 흠집 내고 방해만 하시던 엄니가 그러고 사니까 속도 없이 혼자 사는데 뭘 그리 잘 해 먹느냐고 동생들하고 칭찬했다 하시더군요.

사람들 만나기 싫고 골프는 사업 원활해 질 때까지 3년간 스스로 금지령 내리고 골프세트 아버지한테 보낸 터라 주말이면 클래식 틀어 두고 집 청소하고 빨래방에서 빨래하고 건조할 때까지 책보며 글쓰며 지냈습니다.

지옥같은 시간을 버티는 방법 치고는 건전하고 유익한 듯 하지만 잠들기 위해선 위스키가 필요했던 것이 그때 생긴 제일 안 좋은 버릇이었습니다.

사업과 생활이 안정되고도 고쳐지지 않던 것이 아내가 곁을 지키면서 위스키 없이 잠들 수 있었습니다.
아프면 걱정해 주고 식후에 영양제 챙겨 주고 주말에 정원에서 일 하거나 주방에서 요리하거나 2층 침실에서 쉬고 있을 때 들리는 아내의 피아노 소리에 고독했던 시절은 잊혀지고 행복에 젖어 듭니다.

유학생활 내내 잠 잘 시간도 없이 일하고 공부했어도 주말 아침에는 클래식 틀어 두고 쉬었는데 그게 테이프에서 CD 그리고 유투브를 거치며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다 거실 피아노 건반에서 흐르는 생활을 맞이하며 느끼는 행복감입니다.

한때는 스스로 피아노를 치고 싶어 주말마다 피아노 학원에 다닌 적도 있지만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작년 봄엔가 엄니가 집에 다녀 가시면서..
“쟤는 요리시키고 넌 피아노만 친다며?”

아니요.
이제는 쭉 행복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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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표준말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울 여자하고 살다 보니 그게 화제거리가 되기도 하고 놀림거리가 되곤 합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가장 많이 쓰는 게..
넣다 ⇒ 늫다
얻어 먹다 ⇒ 읃어 먹다

그래서 찾아 봤더니..
참외 ⇒ 채미
나무 ⇒ 낭구
가위 ⇒ 가새
구경 ⇒ 귀경
절이다 ⇒ 절구다
성(姓) ⇒ 승
어른 ⇒ 으른
더럽다 ⇒ 드럽다
없다 ⇒ 읎다

제가 쓰는 말에는 이런 것들이 있더군요.

재밌다고 다시 말 해 보라는데..
표준말로 신경 써서
“넣어 주세요.”
했더니 어색하다고 또 웃는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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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
2019. 3. 19. 08:43 일상 日常

내 나이 마흔을 바라 볼 때..
그때는 서른을 넘길 때 보다 힘들었습니다.

서른에는 늦은 유학에 대학 다닐 때 20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애들하고 같이 공부하면서도 어울릴 수 없는 입장과 처지와 세계관을 가지고..

가장 생각이 많았던 시간은 등교 길 대학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강의실로 향하는 대나무 쑥쑥 자라던 길..

일드 코이노치카라(恋のチカラ)에 서른을 정의하는 대사가 있어서..

この世に生まれて30年と6ヶ月19日。もう恋をすることなんて、ないだろうと思っていた。
세상에 태어나 30년하고도 6개월 19일째, 더이상 사랑이란 걸 할 수 없을꺼라 생각했다.

그랬던 서른.
내 인생의 모든 꿈과 희망을 쏟아 부어 일본에 말뚝 박고 집을 사고 사업 시작 해서 해외 사무실도 질러 버렸던 시절.

그러다 더 무겁게 다가 온 마흔..
불혹..

생에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하며 생각들을 글로 남겼습니다.

그런 저한테 용기를 준 사람은 김은숙씨.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이런 대사를 보내 주데요.

“우린 고작 성장기 중년일 뿐이야. 아직 자신의 인생을 바로잡을 시간이 충분히 있어”

그래 어렸을 땐 모든 게 완벽한 시기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부담도 많았는데 난 아직 성장기 중년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이제는 쉰을 준비해야 합니다.

서른은 닥치고 생각했습니다.
마흔은 1, 2년 전부터 생각이 많아 글로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벌써부터 생각이 많습니다.
이제 두달이면 40대도 꺽어지다 보니..

게다가 이번엔 한국에 귀국해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공무원하라시는 거 도망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아버지 칠순 때 쯤 제가 쉰 넘으면 귀국한다고 약속했거든요.
한국에서 25년 해외에서 25년.

그런 맘을 좀 편하게 해 준 드라마가 있으니..
“나의 아저씨”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내용 전개에는 별 관심이 없고 동래 술집에 모여서 술 마시는 중년 친구들 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저렇게 살면 되는 거라고..
한국에 들어 가도 뭐 대단한 걸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내가 내년이면 오십이다 오십!
놀랍지 않냐 인간이 반세기 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게.. 아무것도 안 했어. 기억에 남는 게 없어.
학교 땐 죽어라 공부해도 밤에 자려고 누우면 삼시세끼 챙겨 먹은 기억 밖에 없더니 이게 딱 그 꼬라지야.
죽어라 뭘 한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게 없어.
없어.. 아무리 뒤져 봐도 없어..
그냥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대한민국은 오십년 동안 별 일을 다 겪었는데..
인간 박상훈의 인생은 오십년간 먹고 싸고 먹고 싸고..”

그래도 나는 매화 꽃잎 날릴 때 술 한잔 할 수 있는 이쁜 정원 하나는 만들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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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
2019. 2. 15. 18:51 일상 日常

오랜 기간 대한해협(大韓海峽, 이제 알았지만 현해탄은 잘못된 표현이네요)을 사이에 두고 있다 보니 공항이 좋은 데이트 장소가 됐습니다.
주로 나리타 공항과 인천 공항 그리고 가끔 대구 공항과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만나고 헤어지다 보니 맛집 찾아 시간을 보냅니다.

게다가 인천 공항은 영종도와 월미도 그리고 을왕리 해수욕장이 가까이에 있다 보니 먼 서울까지 나가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2002년에 방영한 일드 코이노치카라(恋のチカラ)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디자이너 기무라가 쇼핑센터 옥상을 연인들의 데이트 스팟으로 리뉴얼 디자인하면서 자신이 데이트할 때 좋았던 장소를 떠올려 봤답니다.
그랬더니 가장 좋았던 장소는 짝사랑하는 여자가 일하는 도너츠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라고..

木村:「つまり、場所なんて関係ないんですよ。二人でいれば、それだけでそれは特別な場所なんです。」

기무라: “그러니까, 장소는 상관 없어요. 둘이서 있으면 그것만으로 그곳은 특별한 장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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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
2018. 7. 18. 15:23 일상 日常/루슨 생각


귀가(帰宅)로 맞이하는, 언제나 닫혀 있는 문..
때로는 음식 냄새도 폴폴나고 노란 꽃무니의 에프론 걸친 미인이 문 열어두고 맞이해도 좋으련만.. ㅎ

저 문처럼 현대사회는 문도 많고 대부분 잠겨있습니다. 특이하게 일본에서는 방은 물론 욕실까지 잠금 장치가 없는 곳이 많은데 어느덧 한국사회는 예전과 다르게 잠겨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다고 하지만 그 문화는 지역 뿐만이 아닌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국제교류로 호주에서 여고생이 일본 가정에 홈스테이를 다녀갔습니다. 그런데 부모한테 감사는 커녕 항의성 연락이 왔습니다. 어떻게 자기 딸을 잠금장치도 없는 방에 재울 수 있냐고..
일본도 요즘 지어진 집들에는 화장실과 욕실에 잠금장치가 있더군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프라이버시가 지켜지길 원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만큼만 보면서 우리는 다른세상을 경험합니다.
하얀 도화지에 그 사람의 생각만으로 채워가는 거죠.

굳이 저 문을 열려고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2012.10.18 kakao story

posted by 루슨
2018. 4. 17. 12:49 일상 日常/루슨 생각


지인과 청주에 대해 얘기하다가 오늘 퇴근길에는 청주에 대해 정리해 볼까 합니다.
시드니에서 아들한테 주고 오는 바람에 다시 주문한 에어팟(AirPods)도 퇴근길에 긴자(銀座) 에플 스토어에 들러 받아 가야 하는데..

지금은 청주라고 하면 음식점에서 마실 수 있는 청하(清河)와 제사상에 주로 쓰는 백화수복(白花壽福)정도입니다만, 사실 우리 민족은 청주를 즐겼습니다.

지금은 소주 맥주가 대세지만 우리의 전통주 청주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맥주(麦酒)야 개화기 이후에 유럽에서 온 술(일본을 통해서)이고 소주(焼酎)는 고려말 원나라(몽골)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조선 초에 소주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세종실록에서 이조판서 허조가..

“예로부터 술 때문에 몸을 망치는 자가 많습니다. 신이 벼슬에 오를 때는 소주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있습니다. 게다가 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이가 흔합니다. 금주령을 내려야 합니다.”

이 원문 찾다가 어제 퇴근길에 정리하는 건 실패했습니다. 결국 번역문만으로 이어 가겠습니다.

위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소주는 조선 초에 보급된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즐겼던 술은?
바로 청주와 탁주(濁酒)입니다.

한자로 알 수 있듯이 누룩으로 술을 빚어 맑은(清) 술을 걸러 내어 청주이고 남은 걸로 다시 술지개미를 걸러낸 탁한(濁) 술이 탁주입니다.
막 걸러냈다고 막걸리라고 한다는 군요.

이렇게 청주는 탁주 보다 귀한 술로 양반이 즐기는 술이고 탁주는 평민이 즐기는 술이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는 가문마다 체크무늬가 있듯이 우리나라는 가문마다 청주 빚는 비법이 전수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일제를 거치면서 주세법에 의해 민간의 술 제조가 금지되어 전통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청주를 즐기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여기는 각 지방마다 이름도 맛도 다르고 특색있는 청주가 참 많이 있거든요.

그 일본 청주의 이름 중에 마사무네(正宗)라고 있습니다. 우리말 발음으로 정종입니다.
우리가 청주를 정종이라고 하는 데 그건 사실 일제 시대 때 우리 전통 청주를 다 없애고 일본 양조 공장에서 만들어 시중에 보급시킨 일본 청주 이름이었습니다.

일본어로 술 주(酒)자를 사케라고 읽는데 일본은 청주를 사케(酒)라고 합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술이라고 인식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청주의 다른 표현으로 니혼슈(日本酒, 일본술)라고도 합니다.

지금은 일본의 술이라고 하는 청주가 8세기에 쓰여진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의하면 백제인이 전한 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백제는 누룩을 발효시켜 술 빚는 기술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중국? 아닙니다. 소서노의 두 아들이 고구려의 유민들 데리고 와서 세운 백제의 지배민족은 고구려(고려)인이었습니다. 이 고구려가 발효 기술이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중국 문헌에 의하면 발효 기술의 하나인 된장을 “고려취(高麗臭)”로 기록되었답니다. 고려 사람만 만나면 된장냄새가 코를 찔렀던 거죠.. ㅋ

중국에도 청주와 비슷한 술이 있는데 이를 황주(黄酒)라고 합니다. 무색 투명하지 않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황주를 즐길 때 우선 색(色)을 즐기고 그 다음에 향(香)을 즐기고 맛(味)을 즐긴다고 합니다.

중국의 황주는 단맛의 정도에 따라 감(甘), 반감(半甘), 건(乾), 반건(半乾)의 4가지로 구분하고 일본의 사케도 카라구찌(辛口, dry)와 아마구찌(甘口, sweet)로 구분해서 즐기는데 우리나라는 고작 청하나 백화수복을 비롯해 몇종류 뿐입니다.

청주를 살리는 길이 우리 전통을 살리는 길인 것입니다.. ㅎ

posted by 루슨
2017. 12. 23. 10:49 일상 日常

햇살 좋은 주말
자스민차의 향기로 시작하는 아침
빨래부터 밖에 널고 화분도 양지 바른 곳에..

오늘도 아침부터 새로운 사실을 깨닿고
눈물 짓다가 웃다가 아주 쑈를 합니다.

내 인생 지금까지..
계획하고 준비하고 다짐하고 고집 피우고
죽어라 노력해서 겨우 하나 하나 끼워 맞췄는데..
그랬는데..

요즘은 하나씩 다가오는 일들이
언제부턴가 정해진 것들을 하나 둘 찾아 가는 느낌.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운명이려니..
그렇게 묵묵히 노력하다 찾아 오는 어느날
아.. 이럴려고 그때 그런 시련이 있었구나..
그렇게 참고 힘들게만 살아 왔는데..

요즘은..
뭔가 바뀐 듯한 전개가
시련인지 행운인지 모르겠고
어떤 날들을 맞이하려고 이러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가슴 속 깊은 곳에
희망을 가지고 하루 하루 노력하다 보면
행복할 수 있을 꺼라는
경험 속의 확신.

이걸로 오늘 하루도
내 삶의 중요한 한 순간으로 기억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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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슨